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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포럼

미국 경제 대공황 원인 및 경과

레이 달리오의 금융 위기 템플릿에서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을 다루는 내용이 나온다.

 

대공황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라디오와 자동차 산업이 미국을 이끌게 된다.

라디오가 19226만 대에 불과했던 것이 1928년 대공황이 일어나기 전에는 750만 대까지 증가했다.

자동차 역시 1929년에는 10년 전보다 3배인 23백만 대에 이르렀다.

당시 미국 신문은 경제에 대한 낙관적 시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1929년 가을 거품은 터지게 된다.

주식 시장이 폭락하자 당시 연방준비제도는 금리를 6.5%에서 6.%로 낮추었고 다시 5%로 떨어뜨렸다.

 

금리가 떨어지자 일시적으로 주가가 반등했지만 다시 급락했다.

당시 공화당원이었던 후버 대통령은 1% 감세와 17,500만 달러 규모의 공공 지출 확대를 제안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시장이 붕괴하는 동안 유동성을 적극적으로 제공했다.

그러자 낙관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당시 집권 여당은 미국 경제의 위기가 다른 나라들의 반경쟁적 행위 때문이라며 관세를 높여야 침체된 제조업과 농업을 되살릴 수 있고, 이민을 제한해야 실업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스무트 홀리 관세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2만 개 제품에 20%의 높은 관세가 부과된다.

미국 경제

미국은 곧 보복성 보호 정책의 물결에 직면한다.

캐나다를 시작으로 대영제국 등이 동참했다.

후버 대통령은 관세에 이어 또 한가지 악수를 둔다.

일부 전문 인력을 제외한 이민자를 제한하는 최악의 한 수를 둔 것이다.

 

1930년 말이 되자 힘들게 버티던 은행들이 도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대 규모였던 미합중국은행이 파산한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후버 대통령은 결국 모라토리엄(지불 유예 기간)을 선언한다.

미국은 외국에 진 빚을, 외국은 미국에서 빌린 돈을 서로 일정 기간 갚지 말자는 협약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모라토리엄 선언 뒤 1년 후인 1932년에 미국의 위기는 유럽으로 건너 가 오스트리아를 시작해 유럽 은행들의 줄도산으로 이어진다.

 

1932년에는 미국 내에서 수많은 기업이 부도가 나고 많은 사람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32년에는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 수준에 비해 31.5%나 하락한 국민총생산을 기록한다.